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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가족』서로를 보듬어 주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
    영화노트/일본 2019. 7. 24. 15:09

    좋은 영화를 보면 당분간 몸과 마음이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든다. 좋은 여행을 갔다 왔을때와 같은 것일까. 뭔가 새로운 좋은 것을 봤을 때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하는 걸 touched 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는데 터치드하면 당분간 기분이 다르다. 평소에 접속해 있던 세계가 달라보이는 경험이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보고 그랬다. 일주일정도 영화의 장면이 생각났고 떠오를때마다 좋은 기분이 되었다. 잠시 그랬다. 그러다가 또 구태의연해졌다. 내 기분과 감정이. 


    어떤 부분이었을까? 나를 흔들어댄 부분이. 영화를 본 그날밤 꿈을 꿨다. 어릴적 자주가던 약수탕이 배경이었다. 이젠 다 큰 지금의 나와 동생이 목욕탕에 갔다. 그런데 목욕탕의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 사물함에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탕의 모습도 새하얘서 익숙하지 않다. 꿈속에서 나는 약수탕의 예전과 다른 모습에 슬퍼했다.
     『어느 가족』을 보고 왜 나는 어릴적 추억의 장소로 소환된 걸까.


    내가 어릴적 살던 곳은 1층에 5집 2층에 5집이 모여 살던 연립주택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이웃이 있었다. 서로 간의 정이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어디에 가면 옆집 아주머니가 우리집에 와서 어린 동생과 나에게 밥을 차려주시고 설거지도 해주셨다. 옆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여름밤이 되면 부산항이 보이는 현관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옆집 형과 누워서 놀기도 했다. 어른들도 서로 알고 지냈고 왕래 했다. 골목 마다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레 서로 알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뒷집에 남자애 둘이 딸린 집이 이사를 왔고 그 집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친정을 가니 가방이랑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했다. 엄마는 그걸 그냥 이해했다. 폴이라는 개가 사는 2층집 할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아주머니가 급하게 올라와서 도와달라했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들처엎고 병원에 데려갔다.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한 일이라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서울에서 생각해보면 약간 눈물나는 일들이다. 한 골목에 사는 공동체가 있었다. 나는 공동체와 내 어린시절을 그리워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족』은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을 그린다. 
    배경은 2018년 일본. 현재다. 마을이라는 의미의 공동체는 없는 도쿄다. 흔히 도쿄를 그린 영화나 만화를 보면 사람과의 교류가 없는 삭막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 대도시 도쿄에 한 스러져가는 집에 대가족이 산다. 시바타 가족이다. 알고보면 그 가족은 피가 섞이지 않았다. 그런데 서로 보듬어 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학대 받은 소녀를 자기네 집으로 데려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혈연관계의 부모에게 맞은 것으로 보여지는 멍을 시바타 가족은 어루 만져 준다. 영화 곳곳에서 서로 상처를 보듬어 주는 장면이 나온다. 둘째 시바타 아키(마츠오카 마유 역)는 키스바 같은 업소에서 일하는 손님으로 온 남자(청각 장애인으로 보인다)를 보듬어 준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주는게 가족이고 인간이고 공동체다. 할머니 시바타 하츠네(키키 키린 역)는 죽기 전 고마웠다고 말하고 세상을 떠난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산다. 서로 집착 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보여주는 시퀀스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생필품은 사지 않고 훔친다. 영화의 원제는 '좀도둑 가족'이다. 아들 역의 시바타 쇼타 (죠 카이리 역)가 여동생 호조 유리 (사사키 미유 역)가 뭔가를 훔치고 돌아설 때 갑자기 가게의 주인 할아버지(에모토 아키라 역)가 불러세운다. 소년을 불러 쭈쭈바를 주며 여동생은 도둑질을 시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때까지 혼자서 생필품을 훔쳐온걸 할아버지는 알면서도 눈감아 준 것이다. 이후 다시 가게를 찾은 쇼타와 유리. 가게의 문은 닫혀 있다. 할아버지가 죽었다. 그래서 대형 마트로 향한다. 그곳에서 쇼타는 도둑질을 하다 점원에게 들키고 잡힌다. 가족이 소환되고 줄줄이 그들이 법과 시스템의 이름으로는 해선 안되는 행위들이 발각되어 법과 사회와 여론의 심판을 받고 가족은 해체된다.


    시스템과 법의 테두리안에서만 가족이 허용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혈연관계여야지만 같이 살고, 학대나 방치를 당하든 말든 그건 또 법으로 해결하고 시스템으로 해결하고 시스템속의 개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현대사회라는 시스템 바깥에서 산다는 것. 바깥에서 그들은 빈곤하지만 전혀 우울해 보이지 않은 삶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마지막 시퀀스. 아파트 복도 속 혈연관계의 가족에게 돌아온 작은 유리를 혼자 가둬 놓았다. 법, 제도라는 이름의 시스템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까. 말 잘들으면 옷을 사준다는 엄마의 말에도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잘 보일 필요가 없다는걸 아는 걸까.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사는 작은 아파트에서 밖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며 영화는 끝난다.아이는 누군가가 또 자기를 발견하고 주워가기를 바라며 바깥 세계를 응시한다. 


    마치 좀도둑 가족들과 함께 했던 때를 그리워 한다. 보는이에게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다. 다시 나를 데려가세요. 하는 느낌. 시스템 속의 가족. 돈. 그런게 무슨 의미냐며. 사람에게 필요한건 서로 보듬어 주는 온기 있는 사람일텐데.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근데 지금 그 마을이 없다. 편리함으로 나눠 놓은 행정 구역 밖에 없다. 물론, 부모가 아이를 키울수 있다. 물질적 조건은 충족되지만 정신적 조건을 충족 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어렸을때 좋은 기억들은 강원도에서 사촌형들과 이글루를 같이 지었던 경험. 동네에서 동생들과 야구를 했던 경험들이다. 요즘 애들은 어떠한가. 사실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호소한다. 시바타 노부요 (안도 사쿠라 역)는 카메라를 보고 울면서 관객을 보면서 호소한다.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그리 큰 죄냐며. 나를 가둬 놓을 정도의 죄냐며. 매스컴에는 이렇게 실릴 것이다. "빠칭코 주차장에서 버러진 아이를 데려다 10년간 키운 여자"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달랐다. 남자 아이에게 시바타 노부요가 없었다면 저렇게 성장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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