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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 영월 여행 -1부여행노트/국내 2014. 8. 27. 23:32
열차를 오랫동안 타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땅에서 내가 좋아할만한 열차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울 것 같다. 열차 모양이 다 똑같으니까. 지금도 나는 몹시 설원을 달리는 열차를 타고 싶은데, 열차 여행은 꼭 설원을 달릴 때 하는게 맞는거라고 믿고 있다. 여름이지만, 열차를 몹시 타고 싶었으므로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열차시간에 맞춰 청량리 역까지 갔다.
영등포역에서 옆자리에 젊은 여자가 앉았다. 계속 전화를 했다. 전화 내용을 어쩔 수 없이 들었다. 너랑 죽네 사네 못사네. 우리 부모님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여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 남자에게 분노하고 있다. 여자가 전화를 매몰차게 끊었다. 또다시 걸려오는 전화. 매몰차게 끊었지만 다시 전화를 받는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남자와 이야기를 한다. 다시 전화를 받았다는건 그래도 소통 해보겠다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계속 통화를 했고, 나는 제천역에 내렸다.
제천의 밤을 구경하고 싶었다. 역 광장에 나가자마자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구경은 무슨. 방을 하나 잡는다. 3만5천원. 창문 밖에서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술을 먹은것 같다. 금요일밤 12시다. 고함을 쳐도 화를 내도 깔깔 웃고 떠들어도 상관 없을 시간. 남자의 고함소리와 한심할 정도로 불편한 매트리스와 분명 수많은 사람이 덮었을 불결한 이불의 느낌과,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걸까 온갖 상념들로 잠을 설친다.
눈을 떳다. 잠을 거의 못잤다. 잠자리에 예민한 내 승질에 약간 화가 났다. 여관방을 나서 근처 식당에서 떡 만둣국을 먹는다. 제천에서 하루밤을 머무른 이유는 아우라지로 출발하는 첫차를 타기 위해서다. 열차를 탄다. 손님이 없다. 경제논리라면 폐선의 위험이 있어 보인다. 기관사는 열차 앞대가리에서 운전을 하고 차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승객과 함께 일반 객실에 머물다 역에 도착 하면 열차 밖으로 나가 승객을 태우고 내리는 일을 한다. 저일도 분명 지겹겠지. 잠을 못자 짜증이 났고, 여기에다 캔커피를 부었지만, 각성 상태로 짜증이 난 채 시간이 흐른다. 창 밖의 풍경은 별게 없었다. 빼어난 절경도 없이 산 속을 지나가는 느낌이었고 도중에 시멘트 공장이나 마을이 보였다. 비가 오락가락 하다가 아오라지 와서는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우라지가 종착역이다. 승객들이 내리자마자 열차는 플랫폼을 지나 역 뒷편으로 향한다. 기관차를 분리해서 원래 승객 객실 앞이 아닌 뒤로 기관차를 합친다. 돌아가기 위한 준비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차장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일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아우라지는 역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역 밖에는 편의점이 달랑 하나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먹고 아우라지 역 주변을 배회하려 했다. 비가 세차게 내렸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쫄딱 젖기 싫었다. 한시간 정도 있었나. 아우라지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제천행 무궁화호에 다시 몸을 실었다. 전화가 걸려온다. 오래된 친구다.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많이 힘들어보인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시간이 해결해줄거야. 터널을 통과하면서 전화가 연결되었다가 끊어졌다가 한다. 목욕탕을 가보는건 어때. 마음을 다스려. 괜찮아. 나도 얼마전에 사고 쳤어. 아무것도 아니야. 목소리가 짐짓 커진다. 서양인들은 동양인 무시해. 유럽갔을때 만났던 서양인의 친절을 비즈니스에서 기대하지마. 당당하게 윽박지르는게 최고라고. 아우라지에서 영월로 향하는 열차에서 할만한 통화내용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황폐한 열차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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