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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바로 조회 하기 ▼ 2020. 3. 21. 14:27
출간 된 이후 총3번을 봤다. 원문으로 한번보고 책을 처분했고, 번역본으로 출간되자마자 보고 책을 처분했다. 이번에 또 무슨 바람이 불어 이 책이 몹시 다시 보고 싶어졌다. 아까운 생각이 들어 중고도서로 책을 구입했다.
소설가마다 글 쓰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내가 책을 읽어본바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집필 방식은
1. 억지로 쓰지 않는다. 장편 소설이 쓰고 싶어지면 그때부터 집필을 시작한다고 한다.
2. 무리해서 쓰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4~5시간 정도 정해진 양만을 집필한다.
3. 시간을 내편으로 만든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소설을 쓸 체력을 만든다는 뜻이다. 잘 알려진바 하루키는 마라톤 매니아에 야채 샐러드를 즐겨먹는다. 1Q84에도 "몸은 영혼이 들어 앉은 신전이다"라는 부분이 나올 정도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피지컬과 "실감"을 중시하는 작가
하지만 1,2,3번이 가능한건 전업 작가만이 가능 할 것이다.
그에게도 초보 작가 시절이 있었다. 운영하던 재즈바의 하루가 끝나면 부엌식탁에서 끄적끄적 원고지에 글을 쓰던 시절말이다.
사실, 하루키의 작품 대부분을 접하다 보니 술술 읽히는것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하루키만의 클리셰랄까에 조금은 질려가고 있는 것도 사실. 이건 질려서 싫다라기 보다는 내가 하루키의 텍스트를 많이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그의 집필 방식이 궁금하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다만, 소설을 쓰는 법과 같은 테크니컬한 방법을 얻고 싶다면 물러나는 것이 좋다. 내가 읽은 바로는 하루키는 따로 구성을 만들지 않고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술술 쓰는 타입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뇌에 많은 양의 텍스트를 간직해두어야 할 것.
책속으로
p23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허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p24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런 불필요한 면, 멀리 에둘러 가는 점에 진실, 진리가 잔뜩 잠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p29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서설을 씁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물론 한 사람의 작가로서 당연히 마음을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p37 하지만 즐거웠습니다. 그것 또한 틀림없는 말입니다. 아직 젊었고 지극히 건강하기도 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온종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작기는 해도 '독립주의 군주'였습니다. 만원 지하철 타고 출퇴근할 필요도 없고 따분한 회의에 나갈 필요도 없고 마음에 안 드는 보스에서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다양한 재미있는 사람, 흥미로운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p74 독자가 천몇백 엔 혹은 몇천엔의 돈을 내고 한 권의 책을 살 때, 거기에는 평판이고 뭣이고 없습니다. 있는 것은 '이 책을 읽어보자'라는 (아마도) 솔직한 마음뿐입니다. 혹은 기대감뿐입니다.
p99 스타일의 질을 논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 몸집을 가진 실제 사례를 남기지 않고서는 '검증 대상에 오르지도 못하게' 됩니다.
p104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서 어렵사리 이렇게 (일단은)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인생은 단 한번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나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p105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쥴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p105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p106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p109 다양한 표현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성하고 자발적인 기쁨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p110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p111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을 때만 '자, 써보자'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씁니다.
p113 They produced a sound that was fresh, energetic and unmistakably their own. (그들이 창조해낸 사운드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p122 어떻게든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할 일은 재빠른 결론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p124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인 폴 발레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착상을 기록하는 노트를 들고 다니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온화하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러고는 "아, 그럴 필요가 없어요. 착상이 떠오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p130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쓰려고 했을 때, '이건 뭐,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것을 쓰는 수밖에 없겠다'라고 통감했습니다.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점을 거꾸로 무기로 삼아서 그 지점에서부터 소설을 써 내려가는 수밖에 없겠다, 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앞선 세대의 작가들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p132 내가 유념했던 점은 우선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다양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나 이미지나 광경이나 언어를 소설이라는 용기 안에 척척 집어넣고 그걸 입체적으로 조합해 나간다. 그리고 그 조합은 통념적인 논리나 문학적인 언어와는 무관한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기본적인 작전이었습니다.
p150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p167 나는 내 작품이 간행되고 그것이 설령 혹독한 - 생각도 못할 만큼 혹독한 - 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할 만큼은 했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p170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작품들에 아낌없이 시간을 들였고, 카버의 말을 빌리자면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을 써내려고 노력했다는 정도입니다.
p177 내가 생각건대 사람은 원래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아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한 개인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적인 힘을 바싹바싹 느꼈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생해가며 열심히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p177 역시 소설가는 스스로의 내적인 충동에 따라 자발적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는 기본적인 절차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p181 기초 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 다부지고 끈질긴, 피지컬한 힘을 획득할 것. 자신의 몸을 한편으로 만들 것.
p184 육체적인 운동과 지적인 작업의 일상적인 조합은 작가가 행하는 종류의 창조적인 노동에는 매우 이상적인 영향을 끼치는 셈입니다.
p186 '오늘은 몸이 좀 안좋아, 별로 달리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달렸습니다. 그 문구는 지금도 나에게 일종의 만트라 주문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
p189 마음은 가능한 한 강인하지 않으면 안되고 장기간에 걸쳐 그 마음의 강인함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담는 용기인 체력을 증강하고 관리 유지하는 것이 불가결 합니다.
p199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균형 있게 양립하도록 해야 합니다. 각각 서로를 유효하게 보조해 나가는 태세를 만들어야 합니다.
p200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p207 학교 공부보다 더 즐거운 일이 세상에 아주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러 가고 바다에 수영을 하러 가고 야구를 하고 고양이와 놀고, 그리고 좀 더 큰 뒤에는 친구들과 철야 마작을 하고 여자애와 데이트를 하고 ... 등등입니다.
p211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때문에 영어(혹은 특정한 외국어)를 배우려고 하는가'라는 목적 의식입니다. 그것이 애매하면 공부는 그냥 '고역'이 되어버립니다. 내 경우는 목적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아무튼 영어로(원어로) 소설을 읽고 싶다. 우선은 그것뿐입니다.
p214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 흥미가 있는 일에 대해서는 열심히 철저하게 파고드는 성격입니다. 어중간한 지점에서 '뭐, 됐어'라고 멈춰버리지는 않습니다. 나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합니다. 그러나 흥미를 가질 수 없는 일은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라고 할까,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이 어떻게 해봐도 들지 않습니다. 그런 쪽을 딱 잘라버리는 건 예전부터 상당히 확실했습니다. '이러저러한 것을 해라'하고 외부에서(특히 위에서) 지시하는 일에 관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봐도 대충대충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p222 교육현장의 그러한 병적인 증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시스템의 병적인 증상의 투영입니다. 사회전체에 자연스럽고 힘찬 기운이 있고 목표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으면 교육시스템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대세의 흐름'을 타고 그럭저럭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힘찬 기운이 상실되고 폐색감 같은 것이 곳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가장 강한 영향을 받는 곳은 교육의 장입니다. 학교이며 교실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들은 갱도의 카나리아처럼 그런 탁한 공기를 가장 먼저,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p223 난처할 때 도망칠 수 있는 여지나 틈새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p223 '도망칠 곳이 부족한' 사회가 몰고 온 교육 현장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든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p223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팔다리를 쭉쭉 펴고 느긋하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제도, 엄격한 상하관계, 효율, 따돌림,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p225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p225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p228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p228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 입니다.
p236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등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하면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말고 관찰하는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p254 소설을 쓸 때는 우선 아이디어가 불쑥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에서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펼쳐집니다.
p260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 치유'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승화해나간다-는 것입니다.
p269 단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p270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p311 하나의 포지션, 하나의 장소(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장소)에 안주해서는 창작 의욕의 신선도는 감퇴하고 이윽고 상실됩니다. 나는 다행히 마침 적당한 때에 바람직한 목표, 건전한 야심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바로 조회 하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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